10년도 전에 그 사람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말로
나를 꺾어넘겼지만 나는
아무런 반감 없이 순응했다.
그때는 적당히 때가 탄 지금보다
반항적이었을 텐데 말이다.

빨리 어른이 되기를 강요받았던지라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종종 듣던 나였지만
사실 그 속에는 욕심 많고 제멋대로인 고집쟁이가
들어 있었을 따름이다. 아마도 그 사람은
보았을 것이다.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기대에 지쳐
제대로 발현되어 본 적이 없는
스무 살짜리 아이의 뒤늦은 투정을.

그는 나를 이해한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그럴듯한 말로 설득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나를 적절히 훈계했고 부드럽게 달랬다.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나보다 한 살 많았을 뿐인데
그래서 정말 '어른'처럼 느껴졌다.



누구나 자신의 자아상을 필사적으로 보호하려고 한다
그것은 '남이 보는 나'가 아니라 '내가 보는 나'와 관련이 깊다.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스스로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자신의 생각과 표현, 남들이 수용하는 것 사이에는 수많은 지뢰가 묻혀 있다.
내 생각을 적절히 표현했는데 타인의 오해(?)를 사는 경우도 무수히 많고
생각을 적절히 표현했다고 믿지만 사실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심지어는 한 사람 안에 정반대의 생각들이 같이 들어 있는 것도 많이 볼 수 있다.

그중에서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스스로 굳게 믿는 부분이 있는데
아마도 그게 그 사람의 자아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부분을 공격당하면 사람들은 쉽게 감정적으로 변한다.
'나는 박애주의자'라고 믿는 사람에게
'사실 너는 위선자!'라고 말하면 누가 자신을 변호하려 하지 않겠는가.



나쓰메 소세키의 책을 읽고 있다보니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다.
그는 참 혼자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인 게 소설에 나타나는데
어쩔 수 없이 침울한 사람인 게 보인다.
그래도 그를 좋아하는 것은
그런 자신을 또 꽤나 우스꽝스럽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 줄로 요약하면
'니들은 참 우둔해, 하하하. 근데 이런 나도 참 별볼일 없는 인간이란 말이지'



회사를 그만둔 지 20일 정도 지났다.
3월부터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것이 그나마 오래갔다.
5월부터 이직제의가 있었던 것도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는 만사가 귀찮아 잠수를 타버렸다.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생각했지만
백수가 되어 대략 신변 정리를 하다 보니
그만 장마철이 되고 말았다.
이게 끝나면 바로 휴가철일 테니
날씨를 원망해야 할지 내 게으름을 원망해야 할지 반반이다.

나는 여전히 내가 어떻게 풀릴지 잘 모른다.
현재를 기준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확실한 것은
지금 내 생각처럼 앞으로 살게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과거에 그랬듯이...

私事思史  |  2009/07/17 02:17

홀로 길을 걸어
내가 지금까지 아는
유일한 길
그 길이 어디를 향해 난 건지
나는 몰라
그렇지만 길은 내 집이고
나는
혼자 걷고 있어

유일하게
내 그림자가 곁에서
걷고 있어, 유일하게
나의 약한 심장만이 뛰고 있어
가끔 저기 어디쯤에 있는 사람이
나를
찾아내주기를 기대하기도 해, 그때까지는
혼자 걷고 있어

나는 선을 따라
걷고 있어
나의 마음 어딘가를 나누는
그 선
끝에서
혼자 걷고 있어
엉망이 되어버린 것들을 떠올리자
모든 것이 괜찮아졌어
여전히 살아 있는지 궁금해서
바이탈 싸인을 체크했어 그리고
혼자 걷고 있어

아무도 오가지 않는 이 길
부서진 꿈의 거리를 걸어
도시가 잠든 곳
그리고 이 거리를 나는
혼자 걷고 있어
혼자 걷고 있어
혼자 걷고 있어
나는...

- Green Day, boulevard of broken dreams

타인의 취향  |  2009/06/30 03:24

1.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제인이라는 여자가 딕이라는 남자를 사랑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녀가 사랑하는 대상은 정확히 무엇일까?
간단명료하게도, 딕이라고 대답하면 되겠다.
하지만 딕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며, 그녀는 딕의 어떤 부분을 사랑하는 것일까?

사랑은 낭만적이어야 한다는 이상적 관점으로 보면,
제인이 사랑하는 것은 딕 자체이지 그가 지닌 속성이나 소유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지닌 속성이나 소유물은 변할 수 있고,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반드시 딕일 필요도 없다.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사람이 가진 모든 속성과 소유물 이면에 깔린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것이 그 사람―여기서는 딕―을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사람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러한 실체는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전라특수자(bare particular)라는 것이다.

철학적 전통에서 전라특수자는 각각의 개별적 사물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해내는 역할을 한다.
덕분에 사랑의 대상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이상적인 사랑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전라특수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전라특수성은 변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 의해 복제가 가능한 속성이나 소유물과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랑을 전라특수성과 연관시켜 보는 견해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전라특수성에는 아무런 속성이 없어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사랑이란 표면적으로 알 수 있는 본질에서 비롯된다는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사랑이 외형의 본질에 따르는 것이라는 개념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형이상학에 근거한 이상적인 사랑의 개념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직관적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일반적으로 그 사람이 가진 속성을 이야기한다.
결혼정보업체들은 사람들을 다양한 속성별로 분류한 후 그 결과를 짝짓기에 적용하고 있지 않은가.
과학자들은 사랑의 감정이란 하나의 유전자가 자신에게 딱 맞는 유전자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이 과정은 경험에 의한 특정 속성을 목표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제인이 사랑하는 대상은 딕이 가진 속성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논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도 정답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동안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확실하게 정립한 이론들 중 하나는,
우리가 세상을 직접적으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쉽게 얘기해서 우리는 사물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사물에 대한 생각을 품는 것이다.

지각에 대한 견해가 옳다고 가정할 경우, 제인은 딕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딕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지 딕에 대해 다양하게 지각했을 뿐이다.

물론 지각이란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통해 유추해보자.
맨 먼저 당신이 경험하는 것은 색깔과 모양이다.
다음으로 색깔과 모양이 의미 있는 단어가 되면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단어들의 해석 방향이나 책을 읽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주로 당신에게 달렸다. 

사람을 인지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제인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딕에 대해 품은 자신의 생각이다.
제인의 생각은 실제의 딕과 일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사실상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하여 자신이 갖는 생각이라는 개념이 이상해 보이긴 하지만,
관계에 있어서는 그럴 듯하게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제인이 친구들에게 자신이 왜 딕을 사랑하는지를 설명하는데
친구들의 눈에는 제인이 말하는 딕의 속성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제인이 미치지 않았다면 제인은 실제로는 딕에게 없는 속성을 딕이 가졌다고 믿는 것이다.

둘째, 제인이 처음에는 딕을 사랑했지만
딕이 변해서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고 생각해보자.
하지만 제인의 친구들에게는 딕이 전혀 변한 것 같지 않다.
제인은 미치지 않았고 딕 또한 자신의 변화를 교묘히 숨긴 것이 아니라면,
변한 것은 딕에 대해 제인이 가졌던 생각이다.
제인은 자신이 가졌던 생각에 정이 떨어진 것이지 딕에게 정이 떨어진 것이 아니다.

물론 제인은 처음부터 딕을 사랑한 적이 없다. 자신의 생각과 사랑에 빠졌을 뿐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마다 진정한 사랑에 대한 견해가 다르지만,
한 사람(제인)이 다른 사람(딕)을 사랑함에 있어
그 사람이 가진 속성이나 소유물이 아닌 사람 자체를 사랑한다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변하거나 혹은 비슷한 속성을 지닌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갈 수도 있는 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사람은 없다.
예를 들어 제인이 딕을 사랑하는 이유가 그가 가진 돈 때문이거나 수영복을 걸친 모습이 멋있기 때문이라면, 톰과 해리도 제인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이 딕만큼―또는 그보다―돈이 많거나 수영복을 입은 모습이 훌륭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대체 가능한 사랑은 분명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분명 사람이 가진 모든 속성과 소유물 이면에 깔린 ‘무언가’이다.
그것이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분할 수 있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과학자나 철학자들이 부인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과학적 견해에 따르면,
사랑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유전자를 찾는 유전자가 이끄는 뇌의 상태라고 한다.
당연히 이러한 동기가 목표하는 바는 특정한 경험적 속성이지 어떤 신비한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다.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낭만적 사랑은 그 방법으로 번식이 가능했기 때문에 선택된 진화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전적 개념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란 없다.

과학과 철학 그리고 타블로이드판 신문이 끼친 악영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진정한 사랑을 믿고 싶어 한다.
사실 모든 인류가 진정한 사랑을 믿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유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있다고 믿길 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을 종의 번식을 위한 진화적 도구 이상의 것으로 믿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진정한 사랑을 하기에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칸트가 이미 그 첫 번째 단계를 밟았다.
이 첫 단계에는 진정한 사랑의 기초, 즉 진정한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한 주장도 포함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칸트는 세상을 본체와 현상으로 나누었다.
현상이란 우리에게 나타난 그대로의 사물을 말한다.
이는 우리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제인의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다.
본체는 스스로의 내부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본체란 우리의 경험 너머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본체는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과학으로 규정된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논리상 우리는 그저 현상만 따르고 본체에 대한 추론은 보류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칸트는 우리의 이성을 현상이 갖는 영역을 넘어 본체의 영역까지 확장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덕분에 우리는 형이상학의 선험적 환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진정한 사랑에 있어 선험적 환상인 동시에 결정적 환상은 형이상학적 자아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과 마찬가지로
칸트는 우리가 형이상학적 자아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자기반성을 통한 경험적 자아일 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 스스로의 ‘정신’을 들여다볼 때 형이상학적 자아는 절대 볼 수 없으며,
이때 만나는 것은 다양한 감각과 생각, 그리고 감정이다.

그러나 칸트는 우리의 경험을 마치 하나로 이루어진 자아 안에서 생겨난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야 생각의 틀이 제공되며 형이상학적 자아를 받아들이는 데 유용하다고 했다.
또한 칸트는 단순히 유용성의 문제를 떠나,
우리가 사물을 이해하려면 형이상학적 자아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단언한다.

사랑 얘기로 돌아가 보자. 칸트의 논증은 진정한 사랑의 자아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형이상학적 자아는 있는 그대로 사랑받으며 있는 그대로의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자아다.

신과 자유,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칸트의 논증을 모델로 삼아
진정한 사랑을 이용하여 형이상학적 자아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것도 가능하다.
칸트는 자신의 논증에서 이 세 가지는 증명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도덕의 필수 조건이기에 거부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 방법을 진정한 사랑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논증이 가능하다.
진정한 사랑은 형이상학적 자아 없이는 불가능하고, 형이상학적 자아는 진정한 사랑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형이상학적 자아는 분명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며
우리가 발정기의 짐승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필수 신념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거부할 수 없고, 형이상학적 자아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의 점에서 마릴린 먼로를 읽다> 부분 변용


사실, 믿음은
이성과 합리의 '저편'에 있는 것이다.
실험과 논증을 통해 사실로 밝혀진 일들을 두고 우리는 '믿는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란 정말 쉽지가 않다.
문화五感  |  2009/06/30 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