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에 녹이 슬기 시작했다. 우산에 녹이 슬다니. 이건 정말 예외적인 일이다. 내 우산들은 녹이 슬 새도 없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처음 우산을 잃어버린 기억은 초등학교 때 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비싼 양산을 가지고 학교에 갔다가 어디선가 흘리고 왔다.
잃어버린 양산, 그것은 매화이거나 벗꽃이 아로새겨진 화사하고 비싼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그것을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정작 기억이 나는 것은 엄마에게 혼쭐이 나 그 양산을 찾으러 초등학교까지 울면서 걸어갔다 왔다는 정도, 그리고 울면서 걸었던 그 길이 기억난다.
나는 결국 그 양산을 찾지 못했다.
오랫동안 우산은 내게 있어 그저 소모품일 따름이었다.
중간중간 애착이 가는 우산을 소유한 적이 있었으나... 대학교 때 정말 마음에 들어 산 우산은 고작 한번 펼쳐지고는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가버렸고, 아버지뻘 되는 분이 건네준 붉은 체크무늬 우산도 두어 번 몸을 적시고는 지하철을 타고 달아났다.
그들의 종착지가 지하철 분실물센터가 아니었다는 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분실물들
언젠가부터 손에 들고 다니는 물건들은 십중팔구 없어지기 시작한다.
'피스타치오 나무 아래 잠들다'라는, 여성작가 단편집. 연둣빛의 나뭇잎이 좋은 느낌을 주던 흰 바탕의 표지.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 화장실에 들렀다가 놓고 나왔다.
그 화장실로 언제 다시 돌아갔을까. 책은 이미 없었다. 다 읽기라도 했으면 덜 아까웠을 것을...
앉았을 때 가방과 함께 무릎 위에 얹어놓은 책은 늘 잊어버린다. 그러다가 책은 내리려고 일어설 때야 바닥에 내팽개쳐짐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핸드폰에게 이런 수모를 안겨준 적도 있다.)
...그나마 가방은 쥐고 일어나는 게 용치.
초가을, 술 취해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 택시에서 내리자 골목길이 비틀거린다. 다음날이 되고, 그 다음날이 되고, 그 다음날이 되자 나는 깨닫는다. 남방을 놓고 내렸구나...
그렇게 한 철을 보내고 나니 정말 좋아했던 남방 두 개가 없어졌다. 나는 그 뒤로 그만큼 마음에 드는 남방을 만나지 못했다.
버스에 놓고 내린 가방, 교실에서 분실된 필통, 세수하다가 잊고 떠난 안경... 늘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인생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뭔가를 잃어버리면 그 경로를 추적하고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안타까와하기보다는, 빨리 포기하고 그것을 대체할 다른 무엇을 구하는 데 더 익숙한 사람이 되었다.
잘못된 일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제쳐두고, 잘못된 일을 수습하는 쪽에 먼저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대개, 잃어버린 것은 되찾아지지 않고 잘못된 일은 없었던 일처럼 되지 않는다.
건망증일까
나갈 때마다 늘 핸드폰을 찾고, 열쇠를 찾고, 지갑을 찾는다. 늘 놓던 데다 놓는다고 생각하는데 묘하게도 종적을 감출 때가 있다. 그러면 또 늘 놓던 데만 찾으므로 (이미 거기 없는 걸 알았잖아!) 찾기가 어렵다. 심지어는 눈 앞에 두고 못 찾을 때도 종종 있다. (이미 거기 없다고 생각하고 찾으니까.)
그래도 결국은 찾아내서 들고 나가는 것이 용타.
한동안은 단순히 건망증이라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거기에 무신경(또는 부주의)이 보태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잘 잊어버리므로, 관심이 있는 책은 메모를 해서라도 기억을 한다. 그러나 자주 보는 친구의 반복되는 스케줄은 매번 물어봄에도 불구하고(두어달 동안 같은 질문을 열번은 했던 것 같다.) 여전히 기억을 못한다.
하긴, 물어봐서 알 수 있는 것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다시, 우산
한동안 집에 우산을 두개씩 놓아두었던 적이 있었다. 나갔다가 우산을 잃어버렸는데(잃어버렸다는 것조차도 바로 깨닫지 못한다.) 다음 날도 비가 오면 곤란하니까.
그러다가 꽤 오래(?) 우산 하나 가지고 버틴 것인데, 그게 녹이 난 것이다.
우산이야 늘 잃어버리려고 가지고 다니는 셈이니 항상 지하철 역 입구에서 파는 5천원짜리를 사는데, 정말 오랜만에 우산 하나를 녹이 날 때까지 썼으므로 이번엔 좀 골라가며 사보자 마음먹는다.
급우산점이나 천원마트가 아니라 팬시점(!)에서 우산을 고르다가 1만2천원짜리(!) 자동우산(!)을 사서... 오늘 처음 쓰고 나갔는데... 지하철에서 내리고 다시 펴려니까 안 펴지는 것이다!!!
내렸을 때 비가 거의 안 와서 다행이지...
결국 친구 우산 빌붙어 다니다가 (우산 왤케 작니;;) 하나를 더 샀다... 7천5백원짜리...
역시 우산은 손으로 펴야 되는기여... 자동이 왠말이냐 투덜거리다가... 어떻게 환불해달라 할 것인가를 곰곰히 생각하며 돌아왔는데... 주인아줌마가
너무도 쉽게 접었다가 다시 펴주는 것이다.
내가 접었을 때는 분명히 안 접혀졌다고요!
아줌마와 함께 5번의 연습을 한 후에야 접었다 펼 수 있게 됐다...
(나는 바보인 데다가 팔뚝에 힘도 없는 것이다...)
이로써 집에 우산이 졸지에 세 개가 되었다.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였으니 부디 오래 버텨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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